[스크랩] [공민왕실록] 공민왕의 가족들| 高麗王朝實錄
정암 | 조회 208 |추천 0 | 2012.04.29. 20:46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 인덕왕후를 비롯하여 혜비 이씨, 익비 한씨, 정비 안씨, 신비 염씨, 반야 등 여섯 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 중 반야가 우를 낳았다. 이들 가족 중 반야를 제외한 다섯 부인의 삶을 간단하게 언급하기로 한다. 반야와 왕우에 대해서는 '우왕실록'에서 별도로 다루기로 한다.

노국대장공주 인덕왕후 (?-1365)
노국공주 인덕왕후는 원나라 종실 위안의 딸이며 본명은 보탑실리다. 공민왕이 원나라에 입조해 있던 I351년에 시집왔으며, 그 해 10월에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자 12월에 왕과 함께 개성으로 왔다. 그 후 공민왕은 그녀를 숙옹공주에 봉하고 숙옹부를 설치하였다.

그녀는 결혼한 지 8년이 될 때까지도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대신들은 1359년에 후궁을 선택할 것을 건의하였고 공주도 이에 동의하여 이제현의 딸을 궁중으로 맞아들였다.

하지만 공주는 혜비 이씨에 대하여 심한 질투를 느껴 식음을 전폐하고 누웠다. 이 때문에 궁녀들과 내관들이 그녀를 심하게 비방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어렵사리 임신하여 1365년 2월에 만삭의 몸이 되었고, 공민왕은 이를 기뻐하여 죄수들을 석방하는 특사를 내렸다. 그러나 난산으로 인해 아이를 낳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

그녀의 죽음은 공민왕에게 엄청난 괴로움을 안겨다주었다. 공민왕은 거의 정사를 뒷전으로 미를 만큼 슬픔에 잠겨 지냈고 3년 동안 육식을 하지 않았다. 1365년 4월 대신들은 그녀에게 인덕공명자예선안왕태후라는 칭호를 올렸고 이듬해 원나라에서 노국휘익대장공주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러나 이 시호는 곧 공민왕의 명에 따라 노국휘익대장공주로 고쳐졌다. 능은 운암사 동쪽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정릉이라 하였다.

혜비 이씨 (생몰년 미상)
혜비 이씨는 경주 사람으로 부원군 이제현의 딸이다. 노국대장공주가 아들이 없자 대신들은 공민왕에게 명문 가정의 딸로서 아들을 잘 낳을 만한 여자를 왕비로 들일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1359년 5월 이제현의 딸이 왕비로 간택되어 입궁하였고 그녀가 바로 혜비 이씨다.

그녀는 공민왕의 명령에 의하여 홍륜, 한안 등이 여러 왕비들을 강간하려 하자 이를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이 때문에 공민왕이 그녀를 죽이려 하였지만 그녀의 절개가 워낙 대단하여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1374년 9월 공민왕이 살해되자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능에 대한 기록도 없다.

익비 한씨(생몰년 미상)
익비 한씨는 종실 덕풍군 왕의의 딸이며, 외가의 성씨를 따른 듯하다. 노국공주가 죽은 후에 공민왕이 왕비로 맞아들여 익비에 책봉됐다. 공민왕은 자식을 얻기 위해 홍륜, 한안 등의 측근 젊은이들로 하여금 왕비들을 강간토록 했는데 그녀는 공민왕의 협박을 이기지 못해 이에 복종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공민왕의 소원대로 아이를 잉태하였다. 이때 공민왕이 그녀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자신의 씨앗으로 속이기 위해 홍륜 등을 죽이려고 하다가 되려 피살되었다.

공민왕 사망 이후 그녀는 아이를 출산하였다. 이때 태어난 아이는 딸이었는데, 중랑장 김원계가 맡아 양육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왕 재위시에 대간들이 번갈아 이 아이를 죽일 것을 간언하여 결국 살해하였다.

당시 신하들은 그 아이가 남자아이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여자아이인 것이 드러나자 대간들이 익비한씨를 취조할 것을 간언했다. 하지만 우왕은 공민왕의 허물을 폭로하는 꼴이 된다 하여 받아들이지 않았다.

1388년 위화도회군으로 이성계, 조민수 등에 의하여 우왕이 폐위될 때 조민수는 그녀에게 국새를 맡겼다. 그래서 그녀는 이성계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이성계 등이 창왕을 폐하자 이성계 일파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양왕을 왕으로 세우라는 교서를 내렸다.

공양왕은 그녀에게 정숙선명경신익성유혜왕대비라는 칭호를 올렸다. 그리고 자신의 딸 경화궁주를 그녀의 집에 맡겨 양육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1392년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다음의 삶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당시 대부분의 고려 왕족들은 강화도행 배를 탔다가 수장되었기 때문에 그녀 역시 그때 죽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려사] [세가]에는 정비 안씨가 창왕, 공양왕, 이성계 등에 대한 옹립교서를 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열전]에서는 익비 한씨가 창왕과 공양왕의 옹립 교서를 내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당시 정황으로 보아서 후자가 옳을 것으로 판단되어 [열전]의 내용을 취했다. 정비 안씨는 이성계에 대한 옹립 교서만 내렸을 것으로 판단된다.

정비 안씨(생몰년 미상)
정비 안씨는 죽주 사람으로 죽성군 안극인의 딸이다. 1361년 왕비에 간택되어 입궁하였다. 하지만 안극인이 동지밀직으로 있으면서 시중 유탁 등과 함께 글을 올려 마암의 영안전 공사를 중단해 줄 것을 간했는데, 이 때문에 분노한 공민왕은 그녀를 내쫓아버렸다.

그러나 얼마 후 소환되어 다시 궁궐생활을 하였다. 그녀가 궁중으로 돌아온 뒤 공민왕의 명령에 따라 홍륜, 한안 등이 그녀를 능욕하려 하자 그녀는 머리를 풀고 목을 매 죽으려고 했다. 이에 겁이 난 공민왕은 그녀를 욕보이지 못하도록했다.

공민왕이 죽자 왕에 오른 우왕은 그녀의 미모에 이끌려 그녀를 하루에 몇 번씩 찾곤 하였다. 우왕은 몇 번에 걸쳐 그녀를 취하고자 '나의 후궁들 중에는 왜 어머니 같은 이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그녀와 우왕이 간통했다는 추악한 소문이 나돌았으나 우왕은 끝내 그녀를 범하지 못했다. 우왕의 내면을 꿰뚫어본 그녀는 자기의 동생 판서 안숙로의 딸을 우왕에게 보여주고 마음을 돌리게 했던 것이다. 그래서 우왕은 안숙로의 딸을 맞아 현비로 삼게 된다.

그녀는 우왕, 창왕, 공양왕 등이 폐위된 뒤에 이성계 옹립전교를 내리게 된다. 그 덕분에 그녀는 조선왕조 개창 이후에도 살아남는다.

신비 염씨 (생몰년 미상)

신비 염씨는 서원현 사람으로 곡성부원군 염제신의 딸이다. 노국공주가 사망하자 왕비에 간택되어 신비에 봉해졌다. 그녀 역시 홍륜, 한안 등이 공민왕의 명령에 따라 왕비들을 능욕할 때 거절하였으며, 공민왕이 피살된 후 혜비 이씨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다. 그 이후의 행적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능에 대한 기록도 없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 지은이 : 박영규, 들녁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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